[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30)
신앙적 위기
신실한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던 집사람도 속초에 이사 온 후 점점 믿음이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선장의 성화에 못 이겨 굿을 할 때 돼지머리 우상에게 돈을 물리며 허리를 굽혀 절을 한 적도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다는 생각에 점점 마음이 괴로웠다. 죄인 된 심정으로 계속 살아야 하나 매일 고민이 깊어졌다.
어느 날 고향에 계시던 큰 형님이 조카들을 졸망졸망 앞세우고 기별도 없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사연인즉 충주댐 공사로 단양 시내가 침수될 것 같아 동생이 있는 속초에서 함께 살고자 고향을 떠나 왔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까운 곳에 셋방을 얻어 살게 하고 이발면허가 있어 이발소에 자리를 구해 줬다. 마침 건축하고 남은 목재가 있어서 주인 허락을 받은 빈 땅을 찾아 형님 집 한 채를 더 지어 드렸다. 권 소장의 선박관리를 하다 보니 나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하루는 아내와 심각하게 의논하고 마침내 권 소장과 마주 앉았다. 그동안 소장님의 성원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소장님의 체면을 생각해서 더 이상 공무원 월급을 받기가 어렵다고 말씀드렸다. 계속 동신호 선박관리는 하되 공무원 직은 사직하겠다고 밝히고 미리 준비한 사표를 제출했다. 권 소장은 자기도 찜찜하던 차에 나의 사직을 환영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영림서에서 받던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다.
선주가 되다
1958년 12월 31일, 3년 3개월의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고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집사람과 상의한 끝에 그동안 모아 두었던 얼마 되지 않은 돈과 양양의 오두막집을 처분해 1959년 3월 무동력 소형선박을 매입했다.
작지만 나도 내 소유의 배로 어업전선에 뛰어 들게 된 것이다. 무동력선을 운용할 수 있는 선장을 구하고 속초 바다 청초에서 저인망으로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어획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적으나마 생활에 보탬이 되었다. 여전히 권 소장 소유의 동신호를 관리하며 월급을 받았고 부업으로 내 배도 운용한 것이다.
운명을 바꾼 사라호 태풍
그 날도 평상시와 같이 어판장에서 입항하는 어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동신호 형님.”
나를 찾는 소리 같아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어판장의 깡이었다. 나는 이 친구가 용돈 생각이 나서 그런가보다 싶었다.
“좀 필요해요?” 내가 물었다. 그랬더니 슬그머니 내 귀에 대고 말한다.
“형님, 요즈음 동신호가 입항 전에 찌라시하고 있어요.”
이 말은 배가 어판 장에 도착하기 전에 선원들이 선주 몰래 물고기를 팔아 돈을 착복한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주인 몰래 도둑질을 한다는 얘기다.
어쩐지 근간에 어획량이 좋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속으로는 선장이 ‘배 굿’을 요청할만한데 왜 말이 없나 궁금히 생각했다. 남의 말만 듣고 추궁하기보다 내가 직접 확인한 후 모종의 조치를 단행할 요량으로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1959년 9월 17일, 새벽녘에 내가 소유한 무동력선 선장을 대동하고 연안바다(가까운 바다)로 나갔다. 찌라시 행위가 벌어질만한 지점에 이르렀다. 동신호가 들어오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회오리 바람을 동반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왔다. 함께 있던 선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뱃머리를 돌려 나갑시다.”
동시에 큰 어선들이 우리 배를 추월하면서 육지로 달려갔다. 내가 탄 무동력 선박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대형선박에 구조요청의 신호를 보냈으나 인정사정없이 스쳐 갔다. 어떤 배는 그렇게 지나가다가 갑자기 뒤집혀 침몰되기도 했다.
육지와 가까운 바다에는 배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서로 부딪혀 깨지고 침몰하는 배들이 속출했다. 곳곳에서 살려달라는 비명이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치면서 우리 배 안에는 물이 가득 찼다. 금방 바다 속으로 가라앉을 것 같았다.
내가 타고 있는 배는 아무런 동력이 없다. 그저 사람이 노를 저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선장은 손바닥에 피가 흐르도록 노를 저었다. 인력으로 노를 저어 육지에 도착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선 매우 불가능했다. 다급한 상황이 되니 나도 모르게 하나님만 찾게 되었다. 뱃전에 기대어 사죄의 기도를 올렸다.
“주님! 내가 편히 살 때 뱃전에 돼지 머리를 고이고 우상에게 도와 달라고 빌던 미련한 죄인입니다. 용서하옵소서.”
우리 배는 방향을 못 잡고 파도에 떠밀려 가고 있었다. 아니, 하나님께서 육지로 밀어주고 계셨다. 그 많은 배들 사이를 비집고 내가 탄 배는 마침내 육지 가까이로 접근했다. 저 멀리 등대 밑에는 가족들이 애타게 아우성치는 모습도 보였다. 그 때 집사람도 등대 밑에서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드디어 내가 탄 배가 부두에 들어와 청초호로 뱃머리를 돌리려 할 때 갑자기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집사람은 우리 배가 무사히 부두에 입항하는 것을 보고 청초호로 달음질쳐 달려왔다. 그러나 이미 배는 뒤집힌 상황이었다. 집사람은 우왕좌왕하다가 나중에서야 배가 침몰됐다는 걸 확인했다고 한다. 그때 마침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던 ‘깡’들이 물에 뛰어들어 나를 구해냈다. 뒤집힌 배를 바로 세우며 내 생명을 구했다. 멀리서 집사람이 발을 동동거리며 애 태우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먹구름이 가시고 따스한 햇볕이 구름 사이로 비치기 시작했다. 나는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는 집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또 한 번의 시련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나중에 들은 소식이지만 내가 관리하던 동신호는 강릉 안목이라는 작은 부둣가에서 침몰하고 선원 1명이 실종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절대 나의 과욕을 용납하시지 않았다. 대한민국 태풍 역사상 ‘사라호’ 피해는 대단했다.
동해, 남해, 서해를 모두 휩쓸고 지나간 초대형 사건이었다. 당시 육지의 피해상황은 잘모르지만 속초항에서만도 40여척의 선박이 침몰되고 4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그 시절에 생긴 유행가가 ‘눈물의 연평도’였다. 참으로 사라호 태풍은 내 운명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았다.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하나님을 거역한 죄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이제는 빈털터리다. 남은 재산은 쌀 한 가마니에 불과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암울했다. 그런 와중에도 감사하게 새로운 생명은 태어났다. 1960년 2월 23일 셋째가 태어났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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