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돈 W. 로빈슨은 설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 했다.
강해 설교란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 즉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하여 다시 회중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CLC, 2008, 23p)
설교자가 전달해야 할 설교의 내용은 하나님의 생각이어야 한다. 성경 본문에 의도된 하나님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내려면 설교자는 본문을 둘러싼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 배경을 연구하여 성경적 개념을 발굴해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권위를 담아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 자기 생각과 하나님 생각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때는 그에 합당한 태도와 무게를 실어야 한다. 다음 세대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사실을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고, 또 다양한 견해와 가르침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 다음 세대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적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고, 불합리한 권위를 극도로 미워하며, 마땅히 들어야 할 권위 있는 말씀의 부재로 인한 부작용을 겪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설교의 과제는 설교의 적용과 관련이 있다. 로빈슨은 설교의 적용을 이끌어내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하여 다시 회중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 설교의 적용이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은 상대적으로 젊은 사역자였던 디모데에게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2-13). 디모데가 충성스럽게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때, 그가 선포한 말씀은 먼저 청중 앞에서 그의 인격, 곧 말과 행실 가운데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그의 삶에서 사랑과 믿음과 정절의 열매를 맺어 청중에게 본이 될 수 있어야 했다.
다음 세대는 사회가 만들어낸 권위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단지 나이가 많다고, 경험이 많다고, 특정 분야에서 잘 알려졌다고 존중과 복종을 요구할 수 없다. 그들을 움직이는 진짜 권위는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다. 존경할 만한 인품과 덕이 되는 말, 본이 되는 행실이 따르는 자의 말은 그들이 듣는다. 반대로 인격이 엉망이면, 아무리 뛰어난 논증이나 설득력을 가진 목소리로 메시지를 전해도 청중은 이를 쉽게 외면한다. 비단 다음 세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삶을 통해 선포되는 영의 양식이기 때문에, 설교자의 인격은 모든 듣는 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E. M. 바운즈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나오는 젖이 어머니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이듯이 설교자가 하는 말은 모두 그 설교자의 됨됨이에 따라 내용과 맛이 결정된다…설교 뒤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전인격이 거기 있다…설교가 성숙해진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설교가 힘이 있다면 그 사람이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거룩하다면 그 사람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설교에 거룩한 열정이 가득하다면 그 사람이 거룩한 열정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기도의 능력>, CH북스, 16-17pp)
3. 설교의 적용: 하나님의 생각이 나와 회중에게 적용되고 있는가?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점검해야 한다. 성령께서 조명하여 알게 하신 성경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이 먼저 자신에게 적용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용서를 권하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혹시 나는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미워하는 사람은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만일 있다면, 강단에 올라가 준비한 예물을 주께 드리기 전에 먼저 화해하는 것이 맞다(마 5:23-24). 어떻게 설교자 자신은 마음 깊은 곳에 원망과 분노를 품고, 성도들 앞에서는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힘 있게 선포할 수 있는가? 신앙의 양심을 버리고 철저한 외식 주의자가 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한두 번 이렇게 가면을 쓰다 보면, 점점 설교자는 주께서 무섭게 꾸짖으신 ‘화 있는 외식 주의자’가 되어버린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바울도 율법을 자랑하며 외식하는 유대인들을 다음과 같이 책망했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롬 2:20-21). 설교는 먼저 설교자에게 실질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설교라면 청중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더라도 놀랄 게 전혀 없다.
해돈 W. 로빈슨은 <강해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메시지 자체보다는 이를 전하는 이들을 개발하시는 데 보다 관심을 갖고 계시며, 성령님께서는 주로 성경을 통하여 인간들과 만나시므로, 설교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기 이전에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31p). 하나님은 먼저 설교자를 개발하시고, 성령님은 성경을 통하여 먼저 설교자를 만나신다. 귀 있는 자가 되어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설교자만이, 그 삶에서 힘 있게 역사하는 말씀을 경험한 자로서 성도에게 같은 역사를 경험하게 하는 말씀을 선포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하여 회중을 변화시킬 것을 기대하고 또 그렇게 하실 것을 믿는다. 설교가 아무리 오래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고, 짧고 자극적이며 조작이 가능한 미디어에 거의 평생 노출된 다음 세대가 40-50분, 한 사람이 말로만 전달하는 설교를 견딜 수 있을까? 이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의심이 생길 수도 있지만, 태초부터 ‘말씀하신’ 하나님은 과거 선지자와 사도를 통하여, 마지막 날엔 아들을 통하여, 지금은 그 모든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설교자는 그 말씀을 회중 앞에서 전달하는 아주 중요한 책무를 맡았다. 말세에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의와 불법으로 고통받을 때, 진리가 아닌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 만을 찾아 들으려 할 때도, 설교자는 항상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 말씀이 말세에 경건하게 살아갈 힘을 주고, 거짓에서 돌이켜 진리를 따라 살도록 방향을 제시하며, 인격과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서 또 성도 앞에서 자기 인격과 삶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설교자가 얼마나 될까? 성도가 겪고 있는 문제와 짊어지고 있는 삶의 짐을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강단에서 전달되는 몇 마디 말이 정말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들이 겪고 있는 상황을 이겨낼만큼 큰 힘과 지혜를 얻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을 때도 많다. 하지만, 설교자의 책임은 전달하는 것까지다. 말씀의 씨를 심고 말씀의 물을 주는 것 뿐이다.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먼저, 설교자의 삶에서 그리고 회중의 삶에서 말씀으로 반드시 뜻하신 바를 이루신다. 설교자는 바로 그 확신 가운데 계속해서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잡히기 전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다음 세대를 든든히 세워 약속하신 기업을 얻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은혜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신다. 설교자는 먼저 자기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의 말씀을 경험하고, 그 말씀이 회중의 삶에 적용되기를 구해야 한다. 그 은혜의 말씀에 회중을 부탁해야 한다. 부지런히 말씀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분명하게 알고 하나님의 권위를 담아 전달하는 것, 성령께서 본문을 통해 설교자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이 설교자가 할 일이다. 그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하여 반드시 회중을 은혜의 말씀으로 붙드실 것이다. 그들의 믿음을 든든히 세우고 경건한 삶을 일으키고 영광의 기업을 소망하며 살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현세대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다음 세대를 위하여 성경적인 설교가 필요하다. 내용에 있어서, 전달에 있어서, 적용에 있어서 성경적인 설교가 필요하다. 이 일을 위해 헌신할 설교자가 필요하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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