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9)
낙동강 전투는 남북 전쟁에서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낙동강은 아군의 마지막 보루나 다름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낙동강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대한민군은 종말이요, 적화통일은 불 보듯 자명하기 때문이었다. 인민군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결사적으로 공격했고 아군 역시 목숨을 다해 방어했다. 가히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당시 아군은 참으로 용감무쌍하게 싸웠다. 낮에는 UN군 전투기가 강 건너 인민군 진지에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그렇게 적군에 대한 공격이 감행되는 동안 아군은 전열을 가다듬으며 다소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밤이면 어김없이 인민군이 파도처럼 낙동강을 건너왔다. 여지없이 육탄전이 반복됐고 양측에는 엄청난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날이 밝으면 곳곳에 뒹구는 인민군 시체가 즐비했다. 흐르는 물은 진흙과 피가 뒤섞여 엄청나게 탁하게 보였다. 낙동강을 피의 강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매일 많은 부상자가 후방으로 실려 나가고 다시 보충되는 신병들로 재편성하다보니 어느새 나도 제법 고참격이 됐다. 물론 달성국민학교에서 함께 입대했던 친구들은 이미 하나도 내 곁에 없었다. 치열한 전투는 계속됐다. 감사하게도 우리들에게 보급품은 아주 풍부했다. 식사도 육류가 지급됐다.
약 1개월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던 어느 날 장교 하나가 달려왔다. “적군이 퇴각하고 있으니 즉시 도하작전을 개시한다.”고 말했다. 병사들은 믿어지지 않아 서로 얼굴을 바라봤다. 그렇게 모처럼 도하작전에 임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적군의 저항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바로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했던 것이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확실히 반전됐다. 드디어 아군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3중대는 이튿날 포항에 도착해 제1연대에 복귀했다. 부대편성과 동시에 반격작전에 가담했다. 이때는 인민군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고, 강원도 삼척까지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지긋지긋했던 낙동강 전투 당시의 모습들이 눈앞에 스치고 지나갔다. 당시에는 확실한 믿음이 내게 없었지만 특별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감사의 눈물이 절로 흘렀다.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자마자 인민군의 기습으로 군용차가 논에 뒤집혔을 때 아무 부상 없이 살아남았던 일, 빗발같이 쏟아지는 적탄에 쓰러진 전우를 구하기 위해 제방 밑으로 후송하면서도 아무 상처를 입지 않았던 일, 최전방에서 무모할 정도로 수류탄을 던지며 싸움에 뛰어 들었지만 부상 없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을 어찌 운이 좋아서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까? 다시금 돌이켜봐도 시편 말씀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부대는 강릉을 지나 연곡동 사기막에서 남대천 도하를 시도했다. 그러나 강 건너 행정리 뒷산에 포진하고 있던 인민군이 강력하게 저항했다. 몇 번이나 도하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도하작전은 실패를 거듭했다. 부대원들이 남대천 중간 지점까지 진입하면 적이 집중적으로 기관총을 사격하는 바람에 아군은 적지 않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3중대였던 우리 부대는 인접한 우군의 지원을 받아 총공격으로 대항하여 마침내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하고 한숨이 났다. 적은 불과 3명뿐이었다. 더욱이 두 명은 이미 죽었고 한 명은 살아 있으나 얼굴이 피투성이였다.
사연인즉 인민군의 주력부대가 후퇴하면서 3명의 병사에게 기관총을 들려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은 죽기 살기로 우리의 도하작전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인간이 독해지면 불가능이 없다더니 기가 막혀서 한동안 허탈함을 금할 수 없었다.
대구에서 신병으로 함께 입대했던 친구들의 생사는 1954년 제대한 후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14명 중 강민우 등 6명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었고, 상이용사가 된 최일득 등 3명과 휴전 후에 성한 몸으로 제대한 장진○ 등 3명은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나와 ‘지선구’만 생존했다. 친구 ‘지선구’는 성수동2가에 거주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파킨슨병으로 투병중이다.
내가 그토록 집념을 가지고 향학에 불태웠던 ‘고등통신강의’는 지금도 미련이 남는 대목이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6.25사변에 의한 군 입대로 어쩔수 없이 배움의 길을 마감해야만 했다. 요즘은 손저림 후유증으로 예전처럼 글을 잘 쓸 수가 없다. 자꾸만 글씨가 비뚤어져 내 맘대로 써지지 않는다. 지우고 또 지우며 자서전을 쓰고 있다.
1950년 10월 무렵, 우리 부대는 주문진을 경유해 38선을 지나 양양-고성-통천까지 아무런 적의 저항 없이 진군을 거듭했다. 통천에서 숙영할 때 비로소 나의 군번을 알았다. 9704128. 나와 함께 입대했던 동기들의 군번은 038로 시작했다. 왜 그들과 다른지 물어보니 나는 학도병이기에 그렇다고 했다.
한동안 아무런 적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매일 북으로 북으로 진군을 계속했다. 깊은 밤에도 계속되는 진군 때문에 중간대열에서 조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그럴 때면 뒷사람도 같이 선채로 졸아 몇 백미터 중간 대열에 빈공간이 생기기도 했다. 그토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군은 이어졌다.
원산까지 무혈입성하고 함흥에 도착할 때 쯤 적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시가전을 통해 아군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우리 3중대가 함흥형무소에 진격했을 때는 수많은 아낙네들이 땅을 치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몇 시간 전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우익 인사들을 모조리 총살했다는 것이다. 왜 국군이 조금 더 빨리 입성하지 못했느냐고 통곡하는 소리였다.
하나님의 섭리로 중대장 연락병이 되다
함흥시가전에서 중대장 연락병이 부상을 당했다. 그 바람에 내가 대신 중대장의 연락병으로 차출되었다. 나를 추천한 사람은 중대선임하사관 정두현 특무상사였다. 정두현 상사는 작대기 세 개 위에 갈매기 세 개, 그 위에 별을 붙인 병사 중엔 최고 계급이었다. 전투상황이 벌어지면 내가 무거운 배낭에 M1총을 휘두르며 날렵한 동작으로 서에 번쩍 동에 번쩍한다며 나를 칭찬해 주곤 했다.
게다가 키 작은 나를 배려해 무거운 총 대신 가벼운 카빈 소총으로 바꿔주기까지 했다. 그런 분이 나를 추천하면서 중대장을 잘 보좌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그날부터 권총을 차고 망원경을 가슴에 걸고 5만분의 1 지도(50*70cm)를 옆에 끼고 중대장의 호신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중대장에게는 나 외에 2명의 군속이 더 있었다. 한 명은 중대장과 나의 군낭(침구 2장)등을 지고 또 한 명은 중대장과 나의 관물(취사도구 및 세면도구와 작전지도세트)을 지고 따라 다녔다. 당시 나의 직속상관은 육사 8기생인 중대장 대위 박종희였다. 대대장은 같은 육사 8기생 함용익 육군소령이었고 연대장은 맹장으로 유명했던 한신 대령이며 사단장은 육군소장 김백일 장군이었다. 이쯤에서 잠시 홍천 땅의 추억담을 짚어본다.
1950년 11월초, 우리 3중대는 함경남도 명천 바닷가에서 숙영 중이었다. 대체로 중대장은 부잣집으로 보이는 민가에서 숙영한다. 함경도 집들은 대부분 안방과 부엌 사이에 벽이 없어 안방에서 부엌일을 하는 아낙네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우리는 약 일주일 정도 그 집에서 숙영을 했다. 중대장은 옆방에서 혼자 자고 주인 아주머니와 딸은 안방 아랫목에서 나는 윗목에서 잠을 잤다.
하루는 아주머니에게 집안 사정을 물어봤더니(나는 매사에 궁금증이 많은 편이다) 남편은 6.25사변 전에 병사했고 아들은 인민군 해군에 입대했고 지금은 18살 된 딸과 단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인민군에 입대한 아들은 24살이란다.
아주머니는 내게 몇 살이냐고 되묻는다. 18세라고 하니 왜 그리 일찍 입대했느냐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 더 이상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아주머니는 나를 아들 같다며 감자도 구워주고 때로는 누룽지도 챙겨 주면서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화기소대에서 인민군 포로 5명을 생포하여 중대장 숙소로 연행해 왔다. 중대장은 즉시 대대 정보관에게 연락하여 후방으로 압송하라고 명령했고 그 과정에서 포로들이 얻어맞아 피를 흘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아마도 그 모습을 주인 아주머니가 본 것 같다.
밤이 깊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딸(영순이라 부름)과 함께 내게 과일을 깎아 주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그 집에 숙영하기 하루 전날 입대했다는 아들이 대퇴부에 심한 총상을 입어 다리를 절룩거리며 어머니를 찾아와 은신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국군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고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쪽으로 떠났다며 모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간청을 하는 것이다. 혹시 우리 부대가 북진하면서 자기 아들을 포로로 잡거나 발견하거든 제발 죽이지 말고 에미 곁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만일 부대장 연락병이란 지위를 이용하여 포로를 빼돌린다면 조국을 배신하는 것은 물론이고 발각된다면 내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궁금해 그 아들의 이름을 물어봤다. 딸은 종이에 ‘동영근’이라고 써줬다. 아주머니는 아들이 푸른 인민군복을 입고 있다면서 인상착의까지 말해준다. 아주머니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종이를 깊이 간직해 두었다.
남남북녀라 했던가… 과연 함경도 여성들은 예뻤다. 그 당시 내가 북쪽에서 본 여성들은 다들 미녀들이었다. 아주머니의 딸 영순이도 미인이었다. 한순간 이성에 대한 야릇한 감정이 생겼다. 이미 사춘기를 지났으니 인간 본연의 생리가 발동한 것이라 본다. 아침이 밝아 다시 북진 계획이 발표됐다. 마음이 좀 급해졌다. 부엌에 묻어 놓은 물독에 물을 길어다가 채우는 영순에게 다가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영순 양이 끼고 있는 봉숭아 반지를 내게 기념으로 주실 수 있겠소?”
영순 양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집에 가서 주겠다고 했다. 중대장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있는데 영순 양이 과일 접시를 들고 나가면서 잠깐 만나자는 신호를 보내기에 안방으로 갔다. 부엌에서 나온 영순이가 반지를 빼어 내게 주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그녀를 정복한 듯 기쁨에 도취돼 내 손에 얼른 반지를 끼웠다. 손목도 잡아보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도 없었는데 순간 나는 음란한 죄인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잠시 후 영순이가 나를 뒤뜰로 불러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봉숭아 반지를 다시 돌려주세요.”
순간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을 누르고 물었다.
“아니, 왜 다시 달라는 겁니까?”
영순은 말했다.
“조 하사님이 끼고 있는 반지를 어머니가 눈치 채셔서 제 입장이 난처하게 됐습니다.” 대신 다른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순간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별 생각 없이 반지를 되돌려 줬다. 다시 생각해보면 참 순진한 바보짓을 했다 싶다. 만약 내가 그때 장성한 총각이었다면 결코 되돌려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튿날 새벽, 부대가 출발하기 직전 하얀 봉투를 영순 양이 내게 건넸다. 열어보니 하얀 옥양목 천에 무궁화를 수놓은 손수건 한 장과 갈매기 두개 육군하사 계급장이 수놓아진 손수건 이었다.
서운했던 마음에 위로를 받고 그들과 작별의 인사를 했다. 북진하는 내내 예하부대에서 가끔 생포한 포로들이 있으면 슬그머니 접근해 ‘동 씨’ 성을 가진 인물이 있는지 몇 번씩이나 찾아봤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지난 후부터는 그를 찾는 노력을 포기했다.
‘동영순’ 그리고 ‘동영근’….
두 사람의 이름은 60년 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의 옅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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