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네번째 이야기(4):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3)
요한계시록은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끝나는 책이다(1:1, 22:21).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아포칼륍시스)이다. 이 “계시”의 소유권을 가진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사도 요한에게,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종들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신 귀한 말씀이다. 계시(말씀)의 최종 권위는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성도는 반드시 최종 권위를 가진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때가, 마지막이 가까운 줄 아는 자는 계시의 말씀을 읽을 것이며 들을 것이며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더욱 지키려고 힘쓸 것이다(요 14:21). 계 1:3절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 이란, 2절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말한다. 따라서 1: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2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거” 3절에 “예언의 말씀”은 사실상 소유격 구조를 갖춘 “계시”(예언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 동일 범주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종말이, 마지막 때가 가까우면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가 일어나 택한 자들을 미혹할 것을 주님은 이미 감람산 강화에서 예언하셨다(마 24:5,24).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 서두는(1:1-3) 종말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신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예수의 계시만이, 예언의 말씀만이, 그리스도의 증거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될 수 있다(요 14:6). 이 외에는 사탄의 속임이요, 다 술수요 거짓이다.
고난과 핍박받는 교회는 그 길에, 그 진리에, 그 생명에 순종하는 것이 합당하다.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내어 주느냐에 따라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거늘(롬 6:16), 어찌 자신을 거짓된 길로, 교묘한 거짓 진리로, 죽음으로 사탄에게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때가 가까이 오는 줄 아는 이 때에 의(義)가 되신 주께 자신을 종으로 내어 주어 거룩함에 이르고 순종함으로 더욱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가던 이것이 주님과 하나된 거룩한 교회의 합당한 태도다. 이 시대에 “순종”이 우리의 결론이 되어야 한다!
“순종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ὑπακούω”(휘파쿠오), 문자적으로 “아래서 듣다”라는 의미이다. 듣는 자는 말하는 자의 권위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권위 아래 있기에 마땅히 들어야 한다. 구약 성경이 기록된 히브리어로 “순종”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더욱 놀랍고 은혜다. 왜냐하면 “순종”이란 단어가 히브리어에는 따로 없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가 “순종”이란 단어가 있는데, 성경이 쓰여진 히브리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순종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할까? “듣는다”(hear) 라는 동사를 가지고 “순종하다”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듣다”라는 단어를 가지고 만든 헬라어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그러나 두 언어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히브리어는 동사와 명사, 전치사를 가지고 특별하게 만들었다(שְׁמֹעַ בְּקוֹל).
히브리 성경을 보면 세 가지로 강조해(볼드체 부분) “순종”이 중요함을 기록했다. 첫째는 수사 의문문(rhetorical question)을 사용했다(הַחֵפֶץ). 수사 의문문이란 절대 부정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히브리 문학기법이다. 둘째는 히브리 단어 “원하다”(want)라는 의미의 특별한 뜻을 가진 “חֵפֶץ”(chepetz)를 사용했다. 이 단어의 뜻은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라 “매우 원한다”(strong desire)는 의미이다. 셋째는 감탄사, “הִנֵּה”(hinneh), 영어의 “behold!”(보라!) 의미인데 우리 번역은 하지를 않았다. 이 단어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한 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우리 성경은 번역에 있어서 두 부분에(두 번째와 세 번째) 신중을 기하지 못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문자적인 의미를 살려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청종(순종)하다” 라는 히브리 단어는 “שְׁמֹעַ בְּקוֹל”(쉬모아 베콜) 이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소리를 듣다”라는 말이다. “순종”이란 단어를 “들음(듣다)”과 “소리”란 단어를 가지고 특별한 전치사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말씀을 들음” 그 자체가 곧 순종이다. 따라서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두려워 떨었다(출 3:6, 사 6:5, 66:2, 겔 1:28). 그리고 즉시 순종했다. “말씀을 들음”과 “순종” 사이에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히브리어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복음이다!
따라서 우리 안에 말씀을 들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의 말씀 듣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 성경을 보고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들음”이 문제인 사람은 올바른 적용으로, 절대 순종으로 갈 수 없다.
종종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참석해 보면, 어떤 교회는 말씀 듣는 태도가 너무 놀랍다. 메신저가 선포하는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하고(לְהַקְשִׁיב, 삼상 15:22) 노트에 부지런히 적는 성도들을 본다. 한두 성도가 그런 것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는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말씀을 사모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손과 얼굴을 보기만 해도 은혜다. 눈물 젖은 떨리는 눈빛에 감동이 된다.
그런 메신저는 말씀에 생명을 건 자들이다(계 1:1-3). 성경의 권위 아래 압도되어 살아가는 참 선지자들이다. 나는 미국에서 “말씀 외에 재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백한 귀한 목회자를 만났다. 어떻게 그렇게 꼼꼼히 말씀을 준비하고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교회에 발을 딛는 사람들을 십자가 복음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영혼이 기진하여 몸부림을 치는지! 난 그 설교를 들을 때 마다 감동이다. 내 영이 주일이 기다려진다. 말씀이 사모함으로 매 주 기다려진다. 이런 메신저와 그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에는 은혜가 있고 감동이 있고 눈물이 있고 복음의 능력이 있고 심령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안다. “말씀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서로 “아멘!”으로 고백하고 엎드려 경배한다(계 5:12).
그러나 어떤 교회는 눈을 지긋이 감고 귀로만 듣는 교회가 있다. 마음을 두지 않고 귀로만 듣는 사람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들은 것이 금방 나간다. 신 6:4 “쉬마(שְׁמַע) 이스라엘”(שְׁמַע יִשְׂרָאֵ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가 “쉐마”로 잘 알고 있는 삼상 15:21절에 쓰인, “청종(순종)”과 동일 단어다. 여기에 쓰인 “쉬마”의 의미는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내보낸다는 의미가 아니고 한쪽으로 듣고 한쪽 귀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들은 것을 심장(마음)으로 내려 보내는 행위이다. “들음”(שְׁמֹעַ בְּקוֹל, 쉬모아 베콜)이 정상적으로 되어야 “순종”(שְׁמֹעַ בְּקוֹל, 쉬모아 베콜)으로 가는 과정에서 들은 내용들이 마음에서 올바로 작동을 하고 열매를 맺는다. 이미 히브리 성경은 “쉬마”(שְׁמַע)라고 하는 단어에 듣는 것에 주의할 것을 마지막 문자에 두껍게 표시(ע)를 하였다.
요한계시록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에는, 매 교회마다 빠지지 않고 강조하여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복수)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11,17,29 3:6,13,22)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방식대로, 내 맘에 들면 들어도 좋고, 내 맘에 안 들면 안 들어도 그만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럴 말씀이 아니다.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어떤 말씀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반드시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을 말이다. 여기서 우리의 신앙의 승패는 좌우된다.
우리 한글 번역은 “말씀을 들을지어다” 번역을 했지만, 좀 더 헬라어 의미를 살리자면,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들어있다. 헬라어 본문을 보면, “듣다”(ἀκούω) 라는 부정과거 (Aorist) 명령형이 사용되었다(ἀκουσάτω). “마땅히(deservedly)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을 들어야 할 불변의 사실을 표현한다. 히브리 역본은 “יִשְׁמַע נָא”(이쉬마 나) 더 간절한 간청(간접 명령)으로 표현했다. 둘 다 의미가 있다. 마땅히 듣고 마음으로 받아 순종해야 할 그리고 복(행복)을 누려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문법이 들어가면 머리가 하얗고 복잡해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절대 안된다. 성경 해석의 가장 기본적이고 충실한 법칙이, 문자적, 문법적, 문학적, 문맥적 해석이다. 4문(文) 기본 원리를 떠나면 영적으로 영해로 가서 삼천포로 빠진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그럴 소지가 가장 많은 책이다. 아니 요한계시록이란 책은 그렇게 오석(誤釋)의 역사를 가진 책이고 지금도 안타깝게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럴수록 문자적인 해석으로 돌아와 견고하게 뿌리를 내려야 한다.
주님의 간절한 애원을 외면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결국 “애곡하게” 될 것이다(계 1:8). 문자적으로는 이 단어의 의미는 “잘려진다”(cut, cut off, κόπτω)는 의미다. 그래서 애곡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순종이 없는 곳은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고 저주만 일어날 뿐이다. 말씀도, 기도도 아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잠 28:9). 순종이 없는 묵상, 순종이 없는 기도, 순종이 없는 섬김, 순종이 없는 예배, 무의미하다(사 1:10-15). 교회가 순종으로 가지 않으면 주님은 촛대를 옮기신다 말씀하신다(계 2:5). 장소적인 이동이 아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싸워 이겨야(overcome, νικάω) 한다.
요한계시록 이야기를 읽은 이 시간에 우리 다 같이 옷 소매를 거두고 순종으로 나아가자.
로마의 거센 고난과 핍박 아래서 살았던 거룩한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서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살 길이다. 이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복음기도신문]
김명호 | 헤브론선교대학교 성경언어대학 교수. 복음과 기도의 기초 위에 성경의 원어 연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완성을 위한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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