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논구 시리즈>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획을 긋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여태까지 숨겨온 자기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하신다. 베드로는 예수에 대하여 인격적인 신앙고백을 한다.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의 스승인 예수가 “그리스도”(ὁ Χριστός, Christ)요 “하나님의 아들”(ὁ υίὸς τοῦ Θεοῦ, Son of God)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바로 인자이신 나사렛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공적 표명이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의 정체성에 대하여 물은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해석하는 바같이 예수 자신이 메시아 의식이 아직도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분명히 자각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숨겨온 자기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I.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
예수께서 갈릴리 북부지역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신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은 로마가 지배한 당시 만신전(萬神殿, pantheon)이 있었던 곳이다. 수백 개 신상(神像)들이 세워진 이 지역은 여러 신들에게 제사가 드려졌던 곳이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로마 신들의 영향으로 가득했으며,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다신 숭배가 시행되던 장소였다.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의 본래 지명은 바니야스라고 한다. 위치적으로 요르단 강의 원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이곳은 델단에서 약 4킬로 떨어진 지점으로 헬몬산 산 밑 바위 틈에서 매초 물이 20입당 미터 솟아 올라 시내를 이루어 북요단강으로 내려가는 요단강의 원천이다. 이곳에는 바알 신전이 있었다. 이곳에 로마시대로부터 만신전이 있었다. 헬라 통치 시대에는 목자의 신인 판신(Pan god)을 섬기는 곳으로 파니야스(Panyas)라고 불리웠다. 그후 아립인들이 “프”라는 발음을 할 수 없어 지금까지 바니야스(Banyas)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이 바니야스의 수원(水源) 옆에는 만신 동굴이 있다. 동굴 옆의 절벽에는 신상을 세웠던 세 개의 벽감(壁龕)이 있다. 이 지역은 주전 2세기 초에 시리아의 셀루시즈(Selucids)왕조가 이집트의 톨레미(Ptolemy)왕조로부터 뺏은 땅이다. 주전 20년 로마 평화(pax romana)시대를 가져온 아우구스투스 황제(Caesar Augustus)가 헤롯 빌립에게 이 땅을 주었고 빌립왕은 이 물가에 흰 대리석으로 신전을 지어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쳤다. 헤롯 빌립은 자신이 황제에게 바치는 도시라는 뜻으로 도시명을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지었다. 예수 당시에는 이 도시는 헤롯 빌립의 통치 수도였다.
이러한 만신전이 있는 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ὁ υίὸς τοu άνθρώπου, 人子. Son of Man)를 어느 누구와 비교하고 있는가 라고 물으신 것이다. 이에 제자들은 대답한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예수에 대하여 헤롯은 처형된 세례자 요한이 다시 나타났다고 보았다. 마가는 다음같이 기록한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막 6:14-16).
마태도 같은 방식으로 헤롯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마 14:1-2). 어떤 자는 이스라엘의 재건에 대한 희망을 불러 일으킨 엘리야라고 하였다.
어떤 자는 고난의 예언자요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고한 인물이요 새 계약의 전달자인 예레미야라고 하였다. 다양한 평가 가운데서도 예언자 중의 하나라는 평가가 공통점이었다: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막 6:15).
이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신들에 대한 종교적 지식이 아니라 신앙고백, 즉 신앙하는 지식에 관하여 질문하신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들의 스승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즉 제자들이 자신의 전 존재를 헌신할 수 있는 신앙고백에 관하여 질문하신 것이다. 교리적 지식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담보할 수 있는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실존적 신앙의 지식에 관하여 질문하신 것이다.
II.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가 이렇게 물으신 것은 예수 자신이 자기의 메시아적 자아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의 종 자의식(自意識)을 분명히 가지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골고다 고난의 길을 가시기 전에 제자들의 신앙을 시험해 보신 것이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리스도(ὁ Χριστός)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아(מָשִׁיח ַ )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표(公表)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축복하시며 말씀하신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바요나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요나’는 요한의 축약형이다. 베드로란 반석(petro)이라는 뜻이다. 예수를 메시아로 아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두가지 종류의 사람: 혈통으로 난 사람과 하나님으로 난 사람을 구분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예수를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혈통으로 인간에게서 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한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영적 선물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으로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이 성령으로 알게 해주신 자만이 예수가 메시아요 하나님 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
III. 베드로에 대한 축복: 천국 열쇠를 주심
예수는 베드로를 축복하신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열쇠를 준다는 것은 전권(全權)을 넘겨준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에 의해 선포되고 예수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권세를 부여받았다. 음부(陰府)란 죽은 자의 나라이며, 음부의 권세란 사망의 권세를 말한다.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 개인이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했다는 로마 천주교의 교황이 자칭 천국열쇠를 계승한다는 뜻이 아니다. 베드로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 어느 누구에게나 천국의 열쇠가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신칭의의 교리가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앙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의(義)롭다 칭(稱)함을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천국의 시민이 된다. 여기서 이신칭의를 가진 모든 자는 천국의 열쇠를 받는다는 만인제사장(universal priesthood) 교리가 나온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 로마 천주교와 개신교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IV. 메시아의 비밀: 대중영합주의(populism) 거부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공표(公表)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신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 16:20). 예수의 이러한 말씀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메시아 의식의 부재(不在)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 브레데(William Wrede)는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었고 메시아 의식도 없었는데 메시아로 만들기 위해서 마가가 “메시아 비밀”(messianic secret)이라는 것을 창안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상충된다. 브레데는 별세 전에 아돌프 하르낙에게 보낸 개인서신에서 자신의 메시아 비밀 관점을 포기했다.
메시아 비밀이란 브레데가 주장하는 것처럼 마가의 창안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가 주체적으로 가지신 자기 정체성 이해였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가 메시아임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다음 두가지 이유로 볼 수 있다.
첫째는 그가 로마에 반역하는 정치적 선동가로 오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BC 2세기 마카비 형제들(The Maccabee, Judas, Jonathan, Semeon)이 헬라의 셀류커스 가(家)(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무력에 의한 하스모니아 왕국 설립에 대한 사건을 아마도 예수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카비 형제들은 열심당원과 지지하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메시아로 추앙되었다. 그리고 다음 세기 135년의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로마에 대항하여 바르 코크바(Bar Kokhba)반란 시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Simeon Bar Kokhba)가 랍비 아키바 벤 요셉(A.D. 50-135)에 의해 ‘메시아’로 떠받들여졌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예수가 행하신 5병2어 기적을 보고 그를 왕으로 만들려는 군중들로부터 도피하는 예수의 이해되기 어려운 행동을 기술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 14-15).
예수의 도피행동은 브레다 등 자유주의자들이 해석하는 바같이 예수가 메시아 의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메시아 사명이 고난의 종으로서 대중들이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아 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이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고 계셨다. 메시아 사실의 공개는 군중들의 여론을 오해하여 예수에게 고난의 종인 예수에게 엉뚱한 희망을 걸도록 오도할 수 있고, 그렇게 하여 정치적 재판으로 이끌어 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메시아는 거짓 지도자들의 포퓰리즘(populism)에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의 행동은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예수의 메시아 이해는 고난의 종이었다.
예수 자신이 이해하는 메시아 사명은 고난의 종으로서 군중들이 바라는 영광의 메시아상과 달랐다. 예수는 복음사역 시작 시부터 명료한 메시아 의식을 가졌다. 예수의 초기 산상설교에서 그의 메시지는 모세나 선지자를 넘어섰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 자신을 아들이라고 하였고,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복음기도신문]
김영한 |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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