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보는 이슬람(37)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25~37, 개역개정 제4판)
예수와 유대 율법 교사의 대화
우리가 잘 아는 이 말씀은, 한 율법 교사와 예수와의 대화 내용이다. 한 유대인 율법 교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영생을 얻을 방법’을 물어보는 질문으로 시작되어, 계속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을 거치면서 결국, 율법 교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율법 교사가 자신 있고도 의기양양하게 답했던 것은 바로 신명기와 레위기 말씀의 인용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신 6:5),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레 19:18)라는 것이었다.
물론 신명기의 이 말씀은 십계명의 전반부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피조물 인간의 일편단심 충성과 사랑을 요약한 부분이다. 또, 레위기 말씀은 십계명의 남은 후반부 즉, 피조물 사이에서의 계명을 요약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이웃’이라는 단어는 유대적 어법상 집단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동족, 같은 종교권에 있는 사람, 혹은 같은 유대인에게만 국한했었다. 이는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유대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려는 성령의 의도라든지 혹은,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인 예수의 제자들조차 같은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했던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인들의 선교를 위해 안디옥교회로 사역이 옮겨간 사건을 기억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행 11~13장).
그러므로, 배타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을 ‘이웃’이라는 범주에서 제외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웃’에 대한 유대적 관점을 의도적으로 파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는 율법 교사를 향해서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알고 있는 것을 삶에서 행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신다(28). 그러자, 율법 교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느꼈는지, 계획에도 없던 엉뚱한 질문을 하나 더 던져서 다시 예수를 시험하고자 한다(29). 그것이 바로 이웃의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즉, 율법 교사가 예수로부터 기대했던 답은 당시 유대 문화권 안에서의 이웃 개념이었고, 이에 반해, 예수는 율법 교사가 생각하는 유대식 이웃 개념에서 벗어나 이웃의 진정한 개념을 일깨워주기를 원하셨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는 율법 교사에게 유대 권 밖에 사는 사람도 언제나 이웃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이는 율법 교사의 생각뿐 아니라 당시 유대 사회, 더 나아가 모든 독자를 향해 잘못된 이웃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주기를 원했던 주님의 뜻이 숨어 있다.
우리가 생각했던 ‘이웃’과 예수가 말씀하시는 ‘이웃’
우리도 지금까지 위에서 율법 교사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어떤 누군가를 떠오르면서 그가 과연 우리의 이웃이냐 아니냐, 혹은,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만 관심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그가 누가 되든지, 지금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면, 그가 바로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어려운 처지에 빠진 그가 누구든지 전혀 상관없이 우리가 먼저 다가가서 그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깔뱅도 이웃 사랑에 있어서 그 사람의 가치를 따지지 말 것을 얘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거의 전부가 자기 자신의 공로에 있어서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사랑의 의무를 행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먼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입장에 설 것을 얘기하고 있다.
예수는 늘 그러했듯이, 여기에서도 율법 교사가 더 쉽게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하나 사용하는데, 바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이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도 하지 않았고, 그들을 원수처럼 생각했다. 예수의 이 비유를 살펴보면, 유대인 하나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위기에서 같은 유대인 그것도 신명기와 레위기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기들의 유대인 동족을 보고도 차례로 피하여 지나간다(31~32).
이 비유에서 만약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다면 위에서 언급한 유대 식의 관점에서 볼 때, 보고도 피해 지나가는 것이 어느 정도 타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유대 사회 안에서 이웃으로 보기에 전혀 하자가 없는 유대인 동족을 보고도 피해 지나갔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율법을 잘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아는 것을 삶에서 적용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받은 것이다.
그리고, 당시 유대인으로부터 원수(어쩌면 인간 이하로 취급)로 취급받던 사마리아인 중 하나가 지나가다 바로 전에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설명하면서 예수가 생각하는 ‘이웃’의 개념과 ‘역할’이 매우 자세하게 열거되고 있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고 불쌍히 여겼다(33).
본문에서 사마리아인이 자신의 동족을 원수로 여기는 유대인 중 하나가 길가에서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불쌍히 여겼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단어를 영어 성경으로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NIV’에서는, ‘pity’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긴다는 뜻이다(“when he saw him, he took pity on him”).
또한, ‘KJV’에서는, ‘had compassion’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어려움을 당한 자와 함께 하고 그것을 나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when he saw him, he had compassion on him”). 결국, 이는 어려움을 당한 이웃으로서 난민을 향한 마음이 이런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둘째, 가까이 갔다(34).
위에서도 누차 언급하고 있지만, 같은 동족도 아닌 원수지간에 가까이 갔다고 말하는 예수의 의도는 그가 누구이든 간에 가까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동족 유대인을 보고 가까이 가야만 했던 제사장과 레위인을 당시의 사회에서 가까이 가지 않아도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았을 사마리아인을 대조하면서 말과 생각보다 삶에서의 적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재차 강조하고 있다.
셋째,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었다(34).
당시 여행 중이던 이 사마리아인에게 기름과 포도주는 생명과 같은 것이었고 가장 필요한 음식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사마리아인은 이 가장 귀한 음식을 죽어가는 유대인을 위해 기꺼이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마리아인이 가진 행동의 발상은 강도 만난 이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가지고 있던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에서였다(33).
넷째,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34).
요즘 같은 길도 아니고, 당시의 좋지 않은 길을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에게 유일한 교통수단인 자기 짐승에게 죽어가는 유대인을 태웠다는 것은 여분의 짐승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은 걸어갔다는 의미이다. 또한, 자신의 갈 길도 연기하고 시간을 내서 주막으로 데리고 갔으며, 돌보아 주기를 계속했다.
다섯째,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말했다(35).
이 구절에서는 당시 대략 이틀 치 봉급 정도(오늘날의 10만 원)에 해당하는 돈까지 주면서 모자라면 더 갚겠다고 요즘도 하지 않는 소위, 보증까지 서주는 모습을 본다.
구약성경에서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이웃’의 개념은 단지 가까이 함께 사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이웃’과 ‘형제’(히브리어로 ‘아흐’)는 매우 비슷한 동의어이다.
이에 반해서 타국인, 이방인 또는 ‘객’(‘자르’, ‘노크리’)은 유대 밖에 거주하는 비유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관계는 ‘언약’과는 관련이 없으며, 일반적인 환대의 관례를 따랐다. 이에 따라, 타국인과 우거하는 객은 이웃과의 관련해서 율법에 예외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레 19:18) 율법은 같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만 해당한다.
예수는 레위기 19:18을 인용하면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큰 계명이라 말한다(마 22:39, 막 12:31). 그런데, 유대교에서의 윤리적 딜레마는 율법 교사가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이웃에 대한 개념이 예수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었다(29).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은 상인이나 일반 평민을 이웃에서 제외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예수는 율법 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사용해서 사랑과 이웃의 관계를 다시 정의해 주고 있다.
구약 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이 분명한 죽어가는 유대인 동족을 외면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율법 위반으로 보아야 한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함께 거주하는 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더욱이나 유대인도 아닌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연민(compassion)을 보인다(33).
예수의 관점은 이웃에 대한 친절은 사랑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먼저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결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설명하는 ‘이웃’의 개념은 율법 교사 스스로 고백하게 만든, 불쌍히 여기며 자비를 베푼 자이다(36).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의 모든 행동은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웃 개념과 같은 것이며, 이러한 행동을 삶에서 보이는 자가 진정한 이웃이라는 것이다.
오늘 주님은 이것이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자들의 진정한 실천적인 행동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도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당부하고 계신다. [복음기도신문]
김종일 | 장신대 신대원 졸업, 前 중동선교회(MET) 본부장, 現 FOT 선교회 대표. 국내 이슬람권 선교사 네트워크 회장, 저널 ‘전방개척선교(KJFM)’ 편집인, 아신대학교(ACTS) 중동연구원 교수. 저서: ‘밖에서 본 이슬람, 무슬림 이해하기’(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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