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천국의 전문가로 살라

사진: Noah Buscher on unsplash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 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마가복음 4:21~25)

천국의 전문가는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할까요? 누가 천국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마음 밭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외인들에게는 천국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셨기에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깨닫지도 못하고 돌이키지도 못하고 죄 사함도 얻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외인이 아니라 오직 ‘안에 있는 사람’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새 이름을 받은 자, 새로운 피조물, 내적인 변화가 있어 주인이 바뀐 하나님의 사람들만 알아듣도록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꼬방(‘예수님의 꼬마들’의 약자로 교회의 유·초등 저학년반 이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새 이름을 받는다’는 뜻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만일 칠판이 탁자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되면, 우리는 칠판을 식탁처럼 펴놓고 밥을 먹는단다. 만일 칠판이 음악의 도구라는 새 이름을 받으면 칠판을 드럼처럼 치면서 놀 수 있겠지.” 그러자 여섯 살 여자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와, 그럼 하나님께서 호랑이에게 토끼라는 새 이름을 주면 호랑이가 깡충깡충 뛰겠네요!” 그 이야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합니다.

네 가지 마음 밭에 나오는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길가 밭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질 수 없습니다. 내 마음에 이미 세상의 가치가 깊이 심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 가치에는 선한 요소도 있습니다. 협력하고, 봉사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회적 가치들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세상의 가치가 깊어져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길가 밭입니다.

돌짝 밭은 말씀으로 인해 박해와 고통을 받습니다. 석회석 암반에서 뿌리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타 죽습니다. 돌짝 밭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하고 돌이키고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그를 넘어지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아비 친척 집을 떠납니다. 사회적인 안전장치를 다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신분은 안전을 담보 받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다 버리고 떠났는데 시험이 닥칩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죽이라는 시험,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말씀이 나를 흔드는 것이 돌짝 밭입니다.

가시덤불 밭은 탐하는 욕심입니다. 탐하는 마음이란 내 것이 아닌데 내 것 삼으려는 것입니다. 내 영역이 아닌데 내 영역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누구나 탐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탐하는 마음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용인되는 마음이라 하더라도 탐하는 마음이라면 십자가로 가는 훈련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내 것 아닌 것을 내 것 삼는 탐하는 경향은 내가 책임지려고 합니다. 우리 자녀는 우리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내 자녀라면 내가 책임지고 내 의도대로 키우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가시덤불 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주인되어 책임지려고 하는 경향도 과감하게 끊어 내야 합니다. 마음이 옥토가 된다는 말씀은 우리 마음에 주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막 4:21~22)

네 가지 마음 밭을 비유로 말씀하신 뒤에 등불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등불이 있으면 밝히 분별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국을 볼 수 있는 등불이 임했는데도 의도적으로 등불을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고 하십니다. 천국을 의도적으로 밀어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막 4:23)

들을 귀는 곧 믿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들리고 말씀이 들립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 귀는 하나님의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이야기도 들립니다. 네 가지 마음 밭 비유 말씀으로 보면 사탄의 말을 듣게 될 확률은 75%,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확률은 25%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드리게 합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방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지도 않습니다. 사탄도 주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사탄은 천국에서 수석의 자리에서 찬양했습니다. 사탄은 찬양으로 사람의 마음을 살 수도 있습니다. 너무 기뻐서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합니다. 춤추게 하는 감사와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을 더 좋아하는지, 창조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좋아서 하나님을 마음에 채우려고 하는지 분별하셔야 합니다.

사탄은 이렇게 속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해! 그런데 너희들은 세상에서 이것이 있어야 하잖아, 저것이 있어야 행복하잖아!” 하는 가치를 심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배드리고 종교활동하면서 세상의 것을 주님께 채워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열심을 통해 세상의 그것이 획득되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패턴이 어떠한지는 입시 철만 되어도 압니다. 입시 철만 되면 교회에 성도들이 많아집니다. 누가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면, 가정이 흔들리면 새벽예배에 나오고 금식의 자리로 갑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그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제가 누구인지 확인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목사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보다, 제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진정성 있는 사귐을 갖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 보기를 원합니다! 정말 주님을 바랍니다! 저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넘어오시는 주님을 간절히 바랍니다!” 하는 진정성이 확인되는 사귐이어야 합니다.

아버님의 기억력이 갈수록 떨어져서 어려우십니다. 그럼에도 항상 먼저 기도하시는 것은 “내 뇌세포 마지막까지, 주님만 남기를 원합니다!” 입니다. 식사를 하실 때에는 주님만 남기 원한다는 기도를 드리고 “여보, 맛있어요. 수고했어요. 사랑해요”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지막 뇌세포가 남아 있을 때까지 남아 있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어버리십니다. 그럼 제가 힌트도 드리면서 다시 여쭤봅니다. “아버지, 마지막까지 남아 있기를 소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죠?” 그러다 생각이 나면 환하게 대답하십니다.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우리도 정말 예수님을 소원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그리스도만 남아야 한다는 진정성 있는 믿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소원하고 갈망하게 됩니다. 그때 천국이 열립니다.

성경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 말합니다. 내가 양이라면 주님을 따라가는 모습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양심이 그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양심을 속이기 시작하면 가면 쓰면서 살다가 결국 가면놀이 하다가 비극적으로 세상을 마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라면 주님을 따라가는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아가 죽었다는 것은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암에 걸려 죽을 날을 받아 놓았다 하더라도, 암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부인하지 않고 암이라는 문제를 부정하고 밀어냅니다. 문제를 부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느라 주님 앞에서 열심을 내고 경건 생활을 하고 말씀도 읽으며 똑바로 서려고 노력합니다.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를 부인하려고 합니다. 사탄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이 문제가 부인되어야 행복하고, 그 문제가 풀려야 산다고, 그래야 영향력도 있고 복이 있는 사람이 되는 거라고.’ 그러나 성경은 내가 부인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문제에 영향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등불이 임하면 천국이 보입니다. 등불은 천국을 보여줄 수 있는 전문가입니다. 제가 등불이라면 제가 왔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보인다는 뜻입니다. 제가 천국의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스피커가 어떤 과정을 통해 소리가 증폭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오디오 전문가라면 오디오의 매커니즘과 디테일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등불이 된 것은 천국 전문가가 된 것입니다. 등불의 삶을 산다면 실제 천국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황홀경에 빠져서 초막 셋을 짓자고 말합니다. 여러 가지 각도로 풀어 이야기할 수 있지만, 팩트로만 보면 변화산에서 천국을 보니까 땅의 일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있어야 좋은 거야” 하고 말하는 것은 천국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천국을 보면 이 땅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 땅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땅이 중요하다면, 천국은 관념일 수 있습니다. 천국을 보면 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굴지의 대기업 회장에게는 돈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누군가에게 그 돈을 다 줄 테니 천국생활 접고 땅으로 내려오라고 하면 내려올까요? 천국에 있는 누군가에게 25살의 나이로 300년 살게 해줄 테니 내려오라고 하면 내려올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 땅에서 그렇게 발버둥치면서 살까요? 천국을 보지 못했거나, 천국을 허상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열두 명의 가나안 정탐꾼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40일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먹은 음식은 만나였습니다. 백성들은 정탐꾼이 돌아왔을 때 다그치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만나를 주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물었을 것입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정탐꾼들이 보고하는 때가 낮이었다면 구름기둥이 있었을 것이고 밤이었다면 불기둥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탐꾼 10명은 부정적으로 보고했습니다. 교회 리더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이라고만 생각하면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아가 죽었는지 날마다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어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근거는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버리기가 그렇게 힘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가보니 아낙 자손이 살아요, 마차가 있어요, 철기문명이 있어요, 훈련된 군사들도 있어요, 우리는 안 돼요!” 세상에서 갖추어 놓은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길가 밭과 돌밭과 가시덤불 밭과 같은 마음이 교회에도 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마음도 있고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주님을 바라보지’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변화산에서 천국을 봤던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천국을 본 마음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땅의 가치를 버리는 것은 그토록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천국을 보려고 노력하다가 인생은 끝납니다. 주님 바라보는 반듯한 인생 되려고 노력하다가 인생 끝납니다. 인간은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맺을 때 십자가로 달려가는 은혜가 있게 됩니다. 그때 주님과 연합하는 힘을 알게 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게 됩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막 4:24)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듣고 있고, 무엇을 듣고자 하는지, 무엇에 혹하고 있고, 무엇에 마음 빼앗기고 있는지 보여야 합니다. 무엇이 귀에 잘 들리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치가 제대로 들리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말리엘 학파에 왕족 출신이라는 뛰어난 조건을 갖췄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갖고 있던 그 훌륭한 스펙을 욕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헤아려보니까 세상의 그 스펙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헤아려보니까 스펙이 배설물이라는 것이 실제 된 것입니다. 헤아려보는 만큼 주께서 함께하십니다. 자아를 부인하지 않고는 될 수가 없습니다. 문제를 부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말씀은 공허한 울림일 뿐입니다. 수많은 사회적 위치, 쌓았던 경력으로 형성된 가치가 하나님 앞에서 헤아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부인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으면 안 됩니다. 믿음의 연륜이 있는 사람들이 문제가 생길 때 “이렇게 어려운데 주님 앞에서 기도해야지, 뭐하고 있어? 정신 차리고 주님께 기도 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거꾸로 헤아리는 것입니다. “지금 건강이 엉망이고, 자녀도 엉망인데 뭐해! 기도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주님 들어주시니까 기도해!” 이것은 반대로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보다 더 크십니다. 무엇을 듣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면 크게 후회할 수 있습니다.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들립니다. “나의 존재가 주님의 크기 되고, 주님의 존재 되어서,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서 살고 싶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은혜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 18:15~17)

‘누구든지’입니다. 총회장도, 목사도, 사역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과격하게 들려도 성경 말씀은 그대로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갈망이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천국은 못 들어갑니다.

입술로 “나, 예수 믿어요” 이런 고백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교회 안에 속해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천국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어린아이는 원어로 보면 ‘브레포스’(baby)입니다. ‘파이디온’도 어린아이인데 초등학생(child) 정도입니다. 즉, 서너 살 정도의 어린아이가 천국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68평 아파트에 살든 18평 아파트에 세들어 살든 이 어린아이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68평이든 18평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에게는 집이 다 똑같은 집이 아닙니다. 조금 더 과격하게 말하면 이 어린아이에게는 엄마만 있으면 전쟁이 나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경기가 어려워서 무급휴직 한 달만 하라고 해도 큰일이 납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도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면 ‘엄마 아빠는 나가 주시고 휴대폰만 주시옵소서’ 한다고 합니다. 제가 신학 공부하고 목사 고시 보고 목사 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지 못하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린아이가 폐렴에 걸려 40도 가까이 열이 올라가서 죽을 것 같아도 그 아이에게는 옆에 엄마가 없는 게 더 문제 일 수 있습니다. 어디에 방점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정하셔야 합니다. 기분과 형편에 좌지우지되지 말고, 주님을 놓치지 않도록 마음을 정하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 스펙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 것처럼, 진리로 결론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면놀이, 감정놀음과는 작별해야 합니다. 어느 누가 와서 설교하고 강연해도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들려야 합니다. 주님께 마음을 붙이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께 쓰임받는 것은 무엇인지 깨달아 인생이 어긋나도 인생이 성공해도 주님께 돌아오는 인생! 주님의 낯꽃을 살펴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인생! 세상에 쓸 힘이 하나도 없이 온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실제로 은혜라는 것을 경험하는 인생!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는 말씀은 과격한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를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는 이미 타락했고 단 1퍼센트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지정의로 만들어졌기에 우리는 지적 영역, 감정 영역, 의지의 영역이 어디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마음은 육체 덩어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딸이 미국에 있으면 제 마음도 미국으로 갑니다. 마음은 육체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음을 ‘공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공중 잡은 권세가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을 잡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지,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네 가지 마음 밭 가운데 천국 가는 마음 밭은 1/4입니다. 천국 갈 수 있는 마음 밭은 옥토뿐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으면 제 상태가 달라집니다. 예배당에 어떤 음악이 가득하면 어떤 분위기도 형성됩니다. 신나는 음악을 틀면 내가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신납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노력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믿는 믿음이 역사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민감해야 합니다. 마음이 기쁘지 않으면 ‘그놈만! 그것만! 생각하면’ 속도 뒤집어집니다. 그러나 주님 계시면, 공명처럼 울려 퍼집니다. 찬양이 이 공간에 가득해도 우리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왜 주님과 함께하는 그것이 안 되었을까요? 죄와 게으름 때문입니다. 주님께 달려가기를 거부하는 죄, 십자가로 달려가기를 거부하는 게으름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곧 죽어도 주님으로 삽니다!’ 어서 빨리 일어나 나태함을 버리고 십자가로 달려가야 합니다. 죄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만큼 왔다 갔다 했으면 이제 됐습니다. 가면놀이와 감정놀음은 집어치우고 이제 십자가로 달려가야 합니다. 믿음이 역사하는 것을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땅에서 거뜬히 살아내려면, 천국의 전문가로 살아야 한단다.”

주님께 나아가는 거룩한 백성들에게 천국의 전문가로 살아가는 은혜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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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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