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다 망가졌지만 영웅과 악당을 구별 짓는 것은 개인적인 상처가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길에서 창조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파괴로 이어지는가의 여부이다”
망토를 두른 고담 시 십자군에 관한 매트 리브즈의 새 영화는 제목에 정관사 “the”를 포함하는 대담한 선택을 했다. 이 영화의 더 적절한 제목은 ‘더 배트맨’이 아니라, ‘더’가 빠진 그냥 ‘배트맨’(A Batman)일 것이다. 수익성 있는 프랜차이즈가 계속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 최신 재부팅은 고작해야 만화 속 주인공의 수많은 반복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패티슨이 배트맨을 연기하는 이번 영화를 ‘더 배트맨’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대담한 시도인 이유는 이미 만들어진 다른 배트맨 영화들,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매우 진지한 다크 나이트 3부작(2005-2012) 외에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팀 버튼 및 조엘 슈마허가 만든 다소 과장된 버전, 그리고 DC 확장 유니버스 영화(2016-2021)였던 벤 애플렉의 배트맨과 경쟁해서 당당히 최고의 배트맨 영화 자리를 다투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담함이야말로 내가 ‘더 배트맨’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이다. 리브즈는 고담이란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 그 많은 다채로운 캐릭터와 다양한 질감 및 하위 플롯을 재구성함으로써 그는 프랜차이즈 스토리를 리부팅하는 게 왜 여전히 매력적인지, 그 이유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전 고담 시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자꾸 반복될수록 어느 정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과 창의력으로 기대를 뒤집는 완벽한 리메이크 작품을 보는 것은 실로 매혹적이다. 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더 배트맨’이 만든 세계 속에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세 시간이 그렇게 순식간에 흘러간 적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감정적 하드 코어이자 감수성 강하고 예민한 내성적 성격(에니어그램 4)의 배트맨, ‘반지의 제왕’ 속 골롬CGI 수트에서 해방된 앤디 세르키스가 연기한 알프레드, 조디악 킬러에서 영감을 받은 정말 무서운 사이코패스인 리들러, 조만간 HBO Max에서 스핀오프 시리즈가 나올 미드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아이디어를 가지고 온 지하세계의 갱 두목인 펭귄 외에도 이 영화 속 인물 하나하나에서 놀라운 재미를 느꼈다. 그룹 너바나(Nirvana)와 베토벤의 음악이 둘 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 고담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앞으로 나올 속편에서 이 도시 속 캐릭터를 더 풍부하게 발전시킬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도 느꼈다.
이 영화는 외형과 느낌, 얼굴에 이르기까지 배트맨을 새롭게 그려내는 데에 실로 모든 힘을 다 쏟았다. 가히 내가 본 최고의 재부팅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안 좋은 경우에 재부팅된 영화는 친숙한 미학과 플롯을 창의적으로 역류하며 이미 형성된 고객으로부터 돈을 더 뽑아내려는 프랜차이즈 목적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더 배트맨’과 같이 최선의 경우에는 재부팅은 창조적 비전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 건설과 갱신이라는 인간의 소명까지도 제대로 포착한다. 제대로 된 재부팅을 통해서 사람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만들어졌음을 상기할 수 있다.
메타 vs. 미티
‘더 배트맨’을 보면서 생각한 또 다른 슈퍼히어로 영화는 작년 12월의 메가 히트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었다.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영화 팬이 그 영화를 즐겼던 이유 중 하나는 영화 산업이 동일한 프랜차이즈를 지속적으로 재부팅할 때 발생하는 다중 “우주”의 현실에 너무도 장난스럽게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세 명의 스파이더맨인 톰 홀랜드와 앤드류 가필드, 토비 맥과이어가 팀을 이루어 함께 농담을 하고 악당들과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은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이었다. 그러나 ‘노 웨이 홈’이 드러내는 어떤 측면이 나와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나는 ‘더 배트맨’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라는 모티브가 재미있는 만큼, ‘노 웨이 홈’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저 예산 독립 영화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주류 영화에게 큰(meta) 반성거리를 던진다. 스파이더맨을 연기한 이전 배우들에게 의존하는 주류 영화다움의 특징이 주는 효과는 사실상 관객을 영화의 더 깊은 세계 속으로 빠지게 하기보다는 영화 밖으로 끌어내는 느낌이었다. ‘노 웨이 홈’의 세계에서 나는 도무지 ‘더 배트맨’의 세계에서 느낀 그 어떤 몰입감과 실체감을 찾을 수 없었다.
확실히 리브즈의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주로 느와르, 갱스터 영화, 데이비드 핀처 스타일) 영화적 분위기를 풍기지만, 여전히 독립 영화가 추구하는 진지한 전념의 느낌을 주면서 영화를 위해 건설된 매우 구체적인 장소에서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리메이크나 리부트라는 영화 세계의 구축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렇게 창조된 세계가 그 자체로서의 독특함을 담보한다는 신뢰를 줄 때이다. 그러나 리부트 영화가 다른 영화적 세계에 대한 이런 저런 짜집기(metareferences)로 파열될 때, 리부트를 통한 새로운 세계 구축은 단지 허구적 기교를 강조함으로써 창조 행위를 값싸게 만들 뿐이다.
드니 빌뇌브가 만든 영화 ‘듄’(2021)에 폴 아트레이드를 연기한 티모시 샬라메(Timothee Chalamet)가 데이비드 린치의 1984년 버전 듄에서 아트레이드를 연기한 카일 맥라클란을 만나 팀을 이루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만약에 그런 장면이 들어있었다면, 최근 몇 년 동안 만들어진 영화 중 가장 놀랍고 몰입도 높은 세계관 중 하나가 바로 망작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맥베스의 비극’(2021)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조엘 코엔의 완전히 독특한 버전인 덴젤 워싱턴 판 맥베스 속에 과거에 나온 다른 맥베스, 예를 들어 멜 깁슨, 마이클 패스밴더 또는 오손 웰즈 같은 유령이 나오는 꿈의 시퀀스가 포함되어 있다면, 과연 어떨까? 영화 전체가 망가질 것이다.
아무리 소재가 같아도 우리는 각색된 내러티브의 예술성이 신선하고 놀랍기를 갈망한다. 누구나 오래된 이야기를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설정은 아무도 모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성경 시편을 소재로 한 훌륭한 음악적 표지와 신선한 음악적 설정을 좋아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음 제임스 본드가 누구인지, 그리고 007의 최신 영화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어 한다. 셰익스피어의 새로운 연극 각색이나 오스틴의 영화 각색이 결코 늙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야기꾼에 의해 다시 이야기되고, 재창조되고, 재해석되는 훌륭한 이야기와 등장인물에 끌린다.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한, ‘더’ 007, ‘더’ 레이디 맥베스, 또는 ‘더’ 엘리자베스 베넷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오로지 한 명뿐인 ‘더’ 배트맨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버전이 나올 때마다 관객은 이것이 최고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친다. 아마도 그것이 ‘더 배트맨’ 속에 담긴 ‘더’라는 정관사의 대담한 시도에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일 것이다. 즉, 이전보다 더 나은 새로운 창조물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인 갈망이 반영된 셈이다.
어떤 귀중한 작품의 새로운 각색을 보기 위해 극장에 앉아 있는 스릴은 아마도 우리가 언젠가 경험할 새롭고 궁극적이며 최고의 창조물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반영하거나, 심지어 우리 자신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을 보고 싶어 하는 열망의 반영일 수도 있다(고후 5:17). 질서 창조를 통해 창조주를 형상화하려는 우리에게 내재된 소명(창 1:26-28)에는 더 나은 상황을 만들려는 직관적 열망이 내포되어 있다. 혼돈이 점차 질서를 잡아가고, 문제가 해결되며, 슬픈 일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갈망이다. 그러나 우리가 에덴동산 이후 타락한 인류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갱신의 역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방식으로 세상을 만들고 질서를 세우려는 인간의 경향에 의해 추악하게 타협되었다.
‘갱신’이라는 경쟁적 비전
아마도 배트맨의 중심 테마는 부서지고 부패한 세상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갱신의 방식일 것이다. 패티슨의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스펙트럼의 한쪽 끝을 나타내고, 폴 다노의 에드워드 내쉬톤/리들러는 또 다른 쪽의 끝을 나타낸다. 둘 다 고통과 정의(justice)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고아이며, 둘 다 더 나은 방식의 복수를 주장한다. 영화의 여러 지점에서 배트맨은 아예 “복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리들러의 부하 중 한 명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나는 복수다”라고 말한다.
배트맨의 접근 방식은 고담에서 범죄와 부패를 제거하는 데 있어 당국(주로 제프리 라이트가 연기한 제임스 고든 역할을 통해서)을 지원하여 취약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악과 싸우는 데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이다. 리들러 또한 악과 싸우고 고담의 부패를 제거하기를 원하지만, 그는 폭력적이고 “모든 것을 불태우는” (또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방식을 추구함으로 도덕적 순수성을 추구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사실상 도덕적으로 타협된 악당이 된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조이 크래비츠가 연기한 셀리나 카일이 있다. 이 영화에서 세 번째 중심이 되는 이 고아가 추구하는 복수는 타인 중심의 배트맨과 자기 연민에 불타는 리들러 사이에서 갈등하는 개인적인 탐구의 성격이 짙다.
개인적인 트라우마와 희생이 갱신을 향한 우리의 비전을 어떻게 형성할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도덕적 비전에서 불만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것은 대부분의 만화책 영화나 서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배트맨이 묻는 핵심 질문이다. 모두가 다 망가졌지만 영웅과 악당을 구별 짓는 것은 개인적인 상처가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길에서 창조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파괴로 이어지는가의 여부이다.
매트 리브즈의 ‘더 배트맨’은 리부트 영화가 일반적으로 형식에서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플롯을 통해 명시적으로 탐구한다. “리뉴얼”의 모든 작업은 특정 사람의 성격과 창의적인 비전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의 갱신 프로젝트에는 항상 광채와 부서짐, 명료함과 혼란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불가피하게 불완전하고 또한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새롭게 나오는 배트맨의 세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언젠가 만날 최종 걸작 버전을 향한 우리의 호기심과 희망을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재부팅 및 재출시(재건된 교회든 전쟁 후 재건된 국가 이든)가 “더 나은” 희망을 위한 단기적인 원천이 될 수는 있어도, 필연적으로 바라는 “최고”에 대한 우리의 갈망에 부응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이 행하시는 마지막 갱신만이 모든 갈망을 만족시킬 것이다. 모든 눈물이 사라지고,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갈 것이다”(계 21:4). 그때까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더 배트맨’의 끝 장면에 나오는 침수되어 폐허가 된 고담과도 같다. 갱신은 그 자체로 큰 잠재력을 지닌, 여전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이지만 항상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여러 주장이 다투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결국은 사라질 왕국(a kingdom)을 차례차례 제거하시고, 유일하고 영원한 왕국을 통해서 “진짜 평화”(the peace)를 이루실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오직 하나님이 행하시는 마지막 갱신만이 모든 갈망을 만족시킬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더 배트맨’의 끝 장면에 나오는 침수되어 폐허가 된 고담과도 같다”
브랫 맥크레켄(Brett Mccracken) | 브랫 맥크레켄은 미국 TGC의 편집장으로 Southlands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를 비롯하여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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