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탄절에 하나님 아버지보다 더 소외되거나 잊힌 이가 또 있을까? ”
목자들 사이에 끼여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동방박사들에 가려졌을 수도 있다. 천사들에 눈길이 쏠려서 또는 베들레헴 위에서 빛나는 별 때문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탄생 이야기 속에서도, 크리스마스트리 위에서도, 대림절 달력 속에서도, 선물 포장지 인쇄 속에서조차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하나님을 더 잊도록 만드는 수많은 캐럴은 또 어떤가? 성탄절에 하나님 아버지보다 더 소외되거나 잊힌 이가 또 있을까?
이런 망각을 계속 생각하자니, 이 사실이 더 이상하기만 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어 최악의 원수였던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지만, 정작 그 하나님은 장식에나 어울리는 온갖 잡다한 것들에 밀려나 버렸다. 그러나 요셉이나 마리아, 선지자나 사악한 왕, 그리고 목자나 동방박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성탄절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이는 없다. 하나님이 영원하고 불가피하며 또한 거의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아버지가 되시기에, 예수님도 그 첫 성탄절에 아들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영광스럽게 “끝까지 아래로 내려오신” 아버지이시다.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는 이렇게 썼다.
예수님이 “아들”이라는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계시하신 방법이다. 가장 중요한 창조주나 통치자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그는 아버지이다. 끝까지 아래로 내려오신 아버지이다. 따라서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로서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다. 그는 아버지로서 창조하시고, 아버지로서 또한 다스리신다(Delighting in the Trinity, 21-23쪽)
대림절이 상기시켜 주는 사실은 우리에게 주님, 구주, 큰 형이자 왕이 계시지만 또한 우리에게는 무한한 지혜와 끊임없는 사랑의 전능하신 아버지, 첫 번째 크리스마스와 그 이후의 모든 크리스마스를 만드신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독생자
우리는 때때로 대림절 기간에 아버지를 잊고는 하지만, 아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아들이 배신당했던 밤에 올린 그 기도보다 이 사실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 곳도 없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1-3). 굳이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다고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로지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는 목적은 단 하나,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더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파송을 결코 한 번만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전체 기도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는 부담, 그것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8).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요 17:25).
죽으실 준비를 하시는 중에, 무엇보다도 배신과 불의, 고문과 조롱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공포를 앞에 두고 드린 예수님의 기도는 오로지 하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저들이 알기 원하는 그것이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우리가 성탄절에 아버지를 뒤에 남겨두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성탄절이 미묘하게나마 아버지와 아들, 그러니까 진노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과 대척점에 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진노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삼위일체 안에서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진노해서 우리를 벌주시려는 하나님에 대항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싸웠고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2-23).
그렇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다”(사 53:10). 그렇다. 그 아들은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사 53:4)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덮혀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세상에 아들을 보내셨다(요 3:16).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희생시키면서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두셨을 때, 그렇다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덜 사랑한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희생 때문에 아들을 더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7)고 말씀하신다.
성부, 성자, 성령은 사랑의 하나님이자 또한 진노의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보내시고, 아들은 오시며, 그래서 죽고 다시 살아나시고, 성령은 소생시키고 비추신다. 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아버지의 사랑에 관해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는 것을 막지 않았다. 도리어 아들과 우리를 위해서,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아들을 보내도록 촉구했다. 결국 우리에게 아들을 약속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 아들의 오심을 보내신 분보다 더 일찍 예상한 이도 없었고, 아들의 오심을 보내신 분보다 더 기뻐한 이도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하나님보다 첫 성탄절에(눅 2:13-14), 그리고 부활이라는 절정에 이르렀을 때(빌 2:9-11), 더 열정적으로 그를 높인 이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한다. (다행히 모든 성탄절 찬양이 하나님을 잊는 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이 창조되니
그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요 끝이시라
지난날과 장래 일을 모두 주관 하시네
영원토록 영원토록
온 하늘이 찬양하며 천사들도 찬양하네
만국 백성 경배하네 우리의 왕 하나님께
모든 입술 열어 찬양 목소리를 합하여
영원토록 영원토록
하나님께서는 첫 소나무를 심으시기 전에 이미 성탄절 이야기, 곧 “창세 전에 기록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삶”의 이야기를 계획하셨다(계 13:8). 아버지께서는 태양에 불을 붙이기 전부터 이미 십자가가 세워질 땅을 파고 계셨다. 그는 언제나 알고 계셨다. 예수님이 언젠가는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결국에는 피를 흘리실 것임을 말이다. 낳은 사랑, 확고한 사랑, 보내진 사랑, 이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졌다.
보내진 그리고 보내는 아들
아들의 보냄은 첫 번째 성탄절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다시 보내실 것이다(계 1:7, 마 24:36). 그리고 지금과 그때 사이를 사는 우리는 보냄을 받은 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다”(요 17:18).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성자 하나님도 이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 단지 이 세상에서 잠시 더 살게 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어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마음이 새롭게 되며, 생각이 정화되고, 미래가 밝아지고,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만물의 창조주께서 당신의 영광의 광채, 곧 당신의 본성의 정확한 흔적을 당신의 피조물 속으로 보내시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그 순간 전까지는 말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다시 강조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심과 같이, 창세 전에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능력과 가치를 나타내신 그 보내심을 받아 모든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의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십자가 죽음으로 수십억의 영혼을 살리신 아들이, 이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
성탄절을 맞는 우리는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아들을 하늘에서 보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랑으로 이 땅에서 보내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 만물의 창조주께서 당신의 영광의 광채, 곧 당신의 본성의 정확한 흔적을 당신의 피조물 속으로 보내시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마샬 시걸(Marshall Segal) | 마샬 시걸은 작가이자 desiringGod.org의 책임 편집자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으며, 한국어로 번역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당신에게’의 저자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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