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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GTK 칼럼] 배우자를 배우는 사람이 됩시다

사진: Unsplash의 Romina Ahmadpour

04. LEARNER: 배우자를 배우는 사람이 됩시다

언젠가부터 이상한 사회적 풍토 하나가 시작됐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통해 얻어야 할 행복이나 만족감에서 벗어나 오직 자기만을 위한 유익과 행복을 찾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과 정체성을 가지고 그 안에서 만족과 기쁨을 찾기보다는, 인간 아무개로서 가졌던 꿈과 행복을 좇으려 합니다. “그럼 내 꿈은?” “그럼 내 행복은?” 이런 질문이 점점 더 늘어갑니다. 처자식 뒷바라지하느라 자기의 행복을 다 포기한 아버지와 남편이라는 말을 합니다. 자식 키우느라 자기 삶이 사라진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을 키우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수고하시고 희생하셨다는 사실에 반대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진심으로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제가 의문을 품는 사회적 풍토는 그런 희생적 사랑이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본적인 행복과 기쁨을 거스르는 것처럼 혹은 그 행복과 기쁨과는 무관한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한 몸으로 짝지어주시면서 두 사람을 각각 남편과 아내로 세우셨습니다. 부부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각자 하나님이 의도하고 계획하신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럴 때 부부는 한 몸으로 연합된 아름답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되고 사랑으로 서로의 기쁨과 만족을 채웁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세상에 건강하게 드러내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 모습을 통해 두 사람을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남편이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짐으로 여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짐이 아니더라도 본래 자기의 기쁨과 꿈과는 거리가 먼 일을 의무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정말 추구하고 바라는 일차적인 기쁨은 다른 것에 있는데 가정 안에서 남편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그 일차적인 기쁨이 아닌 이차적인 기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니, 너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자주 시간을 들여 나를 찾아야 하고, 내 꿈을 좇아야 하고, 나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하고, 내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세상은 조언합니다. 그래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은 정말 그런 목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가정이라는 굴레 아래 가두신 걸까요? 남자와 여자의 행복과 기쁨은 남편과 아내라는 굴레 밖에서 먼저 얻어야 할까요? 그래야만 하나님이 계획하고 만드신 부부의 정체성 안에서도 이차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걸까요?

이런 구분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개인의 행복과 하나님이 개인에게 부여하신 정체성 안에서의 행복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경중을 따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일차적이고 이차적인지 나누지 않습니다. 성경이 구분하여 경중을 논하는 것이 하나 있긴 합니다. 수직적인 관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수평적인 관계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첫째 되는 계명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둘째 되는 계명인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합니다(마 22:37-40). 쉽게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라는 것이고 그것이 아내, 자녀, 이웃, 기타 모든 타인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은 자가 가족과 이웃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고 얻을 수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직 하나님으로 온전한 만족을 얻은 자만이 어떤 상황에서든 가족을 기쁨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오늘날 만연한 사회적 풍조는 이런 성경적 구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울이 경고한 대로 말세의 고통하는 때, “자기를 사랑”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뿐입니다(딤후 3:2). 하나님은 남자의 기쁨과 행복에 방해가 되는 “남편”이라는 역할을 억지로 지고 가게 하시려고 결혼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남편의 역할을 하면서 누리는 만족과 즐거움은 절대로 하나님의 차선이 아닙니다. 남편, 아내, 아버지, 어머니, 그리스도인, 교회 등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각각의 부르심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뜻에 따른 것입니다.

종종 TV에서 육아에 전념하느라 자기 커리어를 포기한 엄마가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 자기 인생을 되찾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봅니다. 희생적으로 커리어를 포기하고 아이를 헌신적으로 양육한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참 자기 인생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자기 인생을 되찾는다’는 말로서 어머니로서 하나님이 부르신 역할은 부차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일차적 기쁨을 아이 때문에 잃었다가 아이가 자라고 되찾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생겨서 어머니라는 역할이 생긴 것이고, 그 새로운 정체성 안에서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기쁨과 만족을 따라 어머니로서 자녀를 사랑하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커리어를 포기하는 것이 아름답고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임은 틀림없지만, 어머니로서 자녀를 돌보는 일을 선택한 것이 최선을 버리고 차선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양육을 마치고 커리어를 다시 쌓는 것 역시 이제서야 자기 인생을 되찾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도 어머니라는 정체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직장을 다시 얻어 일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아내와 어머니라는 정체성 안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커리어가 주는 기쁨의 원천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그 일을 통해 높이는 데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정체성이 우리의 기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남편의 역할은 아내의 기쁨을 위한 의무이지만 동시에 남편의 기쁨입니다. 아내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일하면서 부차적인 기쁨과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남편이라는 부르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반화시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전 7:17). 부르신 영역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도 목적은 변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즐거움과 기쁨 만족이 주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남편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셨을까요? 부부 관계 속에서 남편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남편이 아내를 진실로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남편이 그 부르심 안에서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누릴 방법일까요?

진실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함께 한다

먼저, 하나님은 남편을 “배우는 사람”(LEARNER)으로 부르셨습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7)

이 말씀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에게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가르쳤던 베드로의 여러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그들은 이제 가정 안에서도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3장 1절부터 가정 안에서 부부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르친 베드로는 7절에서 남편의 역할을 위와 같이 설명합니다. 남편은 아내와 “지식을 따라” 동거해야 합니다.

“동거”는 오늘날 오해하기 쉬운 단어이지만, 본문에서는 분명히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것, 연합하여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한 몸의 원리 안에서 남편은 마땅히 “지식을 따라” 아내를 대해야 합니다.

무슨 지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성경의 지식에 따라 아내를 대우하라는 것일까요? 세상에 널리 통용되는 기본적인 상식이나 예의를 다 하라는 말일까요? 우리말 성경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남편들이여, 이와 같이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인 것을 알고 그녀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벧전 3:7a, 우리말성경)

우리말 성경에서는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지식”을 알라고 말합니다. 개역 개정에서 뒤따라오는 말씀인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지식”의 내용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결국 지식이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나 영적인 원리, 교훈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아내의 특성, 성향, 혹은 아내와 관련된 지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SV나 NASB에서는 “in an understanding way”라고 번역했는데, 아내를 이해하고 헤아리는 마음으로 함께 살라고 한 것입니다. 이해와 헤아림의 영역은 뒤에 나오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연약한 그릇”은 아주 깨지기 쉬운 진흙으로 빚은 도자기를 말하는데, 이것은 단지 신체적으로 더 약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아내는 여자니까 아무래도 더 연약하지, 힘이 약하고 감정적으로도 예민하고…”,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여자의 특성을 그렇게 뭉뚱그려 일괄적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존 파이퍼는 보다 객관적이고 일반적으로 여성이 가진 특성의 강점과 약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존 파이퍼, “남자와 여자, 무엇이 다른가?” 부흥과 개혁사, 2005, 54-55페이지).

긍정적인 특성: 반응이 뛰어나고 동정심이 많으며 공감을 잘 하고 잘 인내한다. 다정하고 따뜻하며 부드럽고 붙임성이 뛰어나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교적이며 사려 깊고 예의바르며 지지를 잘한다. 직관이 뛰어나고 지혜로우며 지각력이 뛰어나고 민감하다. 영적이고 진실하며 상처를 잘 받고 (감정적으로 열려 있고) 순종적이다. 신뢰를 잘 하고 우아하며 사랑스럽고 표현력이 뛰어나며 매력적이다. 섬세하며 조용하고 신실하며 순전하다.
부정적인 특성: 연약하며 수동적이며 맹종하려는 기질이 있고 쉽게 잘 운다. 유약하며 유혹하려 하고 경박하며 허영심이 많다. 수다스러우며 어리석고 감상적이며 잘 속고 분위기에 약하고 속이 좁다. 교활하고 속임수를 잘 쓰며 불평을 잘 하고 성가시게 잔소리하며 쉽게 부루퉁해지고 다른 사람을 숨막히게 하며 원한을 잘 품는다.

이것은 꼭 여성에게만 발견되는 특성은 아니지만 주로 여성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특성을 서술한 것입니다(론다 셔빈이라는 여성이 워크샵에 참여한 여성들에게 직접 받은 의견을 정리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남편이 알아야 할 “지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아내”(your wives)라고 정확한 대상을 말합니다. 자기 아내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가 저 일반적인 특성 가운데 긍정적인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부정적인 특성 중 몇 가지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남편이 잘 알아야 할 것은 자기 아내가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무엇에 강하고 무엇에 약한지 알아야 합니다.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관계 안에서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태도나 말을 좋아하는지 혹은 어떤 태도나 표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어느 정도 일을 감당할 체력이 있는지, 영적으로 강점은 무엇이고 약점은 무엇인지, 어떤 관계를 편안해하는지, 어떤 관계를 불편해하고 어려워하는지 등, 남편은 자기 아내 전공자가 되어 아내를 충분히 알고 이해하며 헤아리는 지식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내를 계속해서 배워가야 합니다. 아내를 연구하는 박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여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아는 “지식”에 따라 자기 아내(여자)와 함께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배우자를 배우라고 합니다. 그것이 남편의 역할이라고 말합니다. 아내를 진실로 사랑하는 남편은 아내를 아는 즐거움 가운데 아내와 함께 살아갑니다.

“연약한 그릇”이라는 말에는 아내를 어떻게 알아가야 하는지 그 태도에 대한 가르침도 담겨있습니다.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대하라는 말은 아주 비싸고 귀중한 도자기를 다루듯, 존경과 공경의 자세로 아내를 소중히 다루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대하신 것처럼 남편도 아내를 가장 귀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입니다. 아내와의 관계는 하나님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막힘). 이 말은 남편과 아내가 한 팀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부부 관계 안에서 각자 개인플레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명의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서로 한 몸으로서 함께 삶을 살아가는 운명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팀을 이루어 경쟁하는 운동 경기를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팀워크입니다. 각각 서로의 강점과 약점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가령 팀원이 수비가 약하면 내가 그것을 보완해주고 상대적으로 강한 공격력을 잘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승리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서로의 약점을 비난하고 불평한다면 패배하기 꼭 알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의 특성은 내가 가지고 가야 할 부담과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기 위해 내가 잘 알아야 할 특성이고 격려하거나 보완해야 할 부분입니다. 불평하고 비난해야 할 점이 아니라 잘 파악해서 함께 맞춰 나가야 할 점입니다.

가령 원치 않는 상황에 부닥쳤을 때 쉽게 당황하고 그에 대한 불편함을 쉽게 말로 표현하는 부정적인 특성이 내 아내에게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럴 경우 “당신은 왜 항상 불평하냐?”고 꾸짖고 나무라는 것으론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 당황스런 상황을 갑자기 만나지 않도록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보호). 혹 그런 상황에 함께 처할 경우 의연하고 담담하게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보완). 그런 부분에 세심하게 배려하는 아내의 강점을 부부가 함께 누군가를 섬길 때 활용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특성 자체가 하나님 앞에 개선되어야 할 점이라면 바로잡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도 신부인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시지 않습니까?(엡 5:26-27).

맞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랄 수 있도록, 주님 앞에 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남편의 두 번째 역할인 “사랑하는 자”입니다(LOVER). 다음 칼럼에서 이것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배우는 자입니다(LEARNER). 아내의 특성을 알고 그 지식에 따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먼저 아내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남편의 배려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큰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남편이 이 역할에 충성할 때 아내뿐만 아니라 남편 역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기쁨을 채우고 만족감을 높일 때 나에게도 찾아옵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행 20:35). 또한 운명공동체로서 한 지체가 세워지는 것은 곧 내가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부로서 연합의 기쁨과 즐거움을 더욱 느끼고, 그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막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남편의 역할대로 사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며, 그분의 영광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만큼 남편의 기쁨과 만족도 온전히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아내를 사랑하기 원한다면, 남편으로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 원한다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기 원한다면, 아내를 배우십시오. 아내를 알아가십시오. 아는 지식에 따라 아내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격려하며 보완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남편과 아내의 관계 속에서 남편이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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